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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인생공부 - 독서

01. 어떻게 살것인가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by 바나나맛완 2021. 8. 16.

 

He who has a "WHY" to live can bear any "HOW".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 니체-

 

  빅터 프랭클 박사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정신의학자였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독일의 수용소에 3년 동안 갇혀 지냈고 그 안에서 본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정신적 치료를 도왔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적인 책입니다. 실제로 빅터 프랭클은 소용소 안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었으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치료법을 창안하게 됩니다.

  로고테라피는 의미(meaning)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Logos에서 따온 용어입니다. 즉, 환자들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내리도록 도와줌으로써 정신적 질병, 혹은 현재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만큼 왜 살아가야 하는지의 이유와 의미는 사람이 삶을 이어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프랭크 박사를 비롯해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갔을까요?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수감자들이 환경에 의해 겪어야만 했던 전형적인 심리적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수용소 수감과 같은 극한의 물리적,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리적 단계의 첫 번째인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으며 아직 한 줄기 희망이 남아 있다고 믿게 됩니다. 이를 '집행 유예 망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 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입니다. 이들도 '수용소 생활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 '만사가 잘 풀릴 거야', '금방 풀려날 수 있을 거야' 등의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곧 절망으로 치닫습니다.

  아우슈비츠 역에 내리자마자 그들은 독일 장교의 손가락 끝으로 운명이 엇갈리게 됩니다. 일을 할 수 있는 인력은 오른쪽으로, 일을 할 수 없어 노동력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인력은 왼쪽으로 분류됩니다. 왼쪽으로 분류된 90% 남짓 되는 사람들은 비누를 하나씩 받고서는 샤워실처럼 생긴 가스실로 향합니다. 노동으로 분류된 10%의 사람들도 가혹한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희망과 환상이 하나둘씩 차례로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제 잃을 것은 본인의 육신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심리적 두 번째 단계인 '무감각'에 들어서게 됩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가혹한 환경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옷 한 벌 걸치지 못한 체 추운 겨울 가혹한 노동을 하고 배식은 조금의 빵과 묽은 수프가 전부입니다. 또한, 카포와 나치 대원으로부터 끝도 없는 구타를 당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짓밟히고 맙니다. 매일같이 사람이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감정을 잃게 됩니다. 이제는 어떤 참담한 모습을 보아도 동정하거나 공포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생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막사 내에서 한 사람이 숨을 거두면 사람들은 시신 곁으로 가 무언가 낚아채갈 것이 없는지 탐색합니다. 그리고 진짜 구두끈이나 신발, 피복 등을 얻으면 좋아합니다.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은 없습니다. 저자 또한 마찬가지로 바로 두 시간 전에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동료가 시체가 되어 눈이 마주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본인의 손에 든 수프를 먹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수감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 변화를 보면 인간 자체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감자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자 빅터 프랭클은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를 간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남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기꺼이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인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뺏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근본적으로 척박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수용소에서도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시련이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p.195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고 이내 미래에 대비한 삶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삶의 의지를 잃습니다. 그저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그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살게 됩니다. 수용소 내에서 이런 사람들은 이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발의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겨우겨우 걸어가던 저자는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 수 있을까?', '신발 끈이 끊어졌는데 어디서 철사를 구할 수 있지?' 등의 당장 눈앞의 하찮은 일에만 몰두하도록 자신을 몰아가는 작금의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습니다. 대신 그는 쾌적한 강의실에서 청중들에게 강제 수용소에서의 심리 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는 상상을 합니다. 그 순간 본인을 짓누르고 있던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어느 정도 본인이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그림으로써 고통을 이겨내고 삶의 의지를 다시금 재확인한 것이죠.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p. 120

 

  실제로 수감소에서는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성탄절, 새해에는 그간 그래 왔던 것처럼 가족들과 지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사람들이 그 막연한 희망이 사라지자 절망감을 느꼈고 끝내 사망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곧 살아야 할 이유, 즉 목표입니다. 자기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은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라고 강조합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릅니다. 따라서 포괄적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그만의 사명이 있는데 이를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도 없으며, 그 삶 또한 똑같이 반복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인에게 부여된 임무는 그만큼 유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자유가 있었던 것처럼, 삶의 질문에 어떠한 태도로 대답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유의지에 의해 돼지가 되거나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다. p. 125

 

  저는 어쩌면 심오하고 막연한 '삶의 의미'를 질문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진리를 통달할 완벽한 묘수를 꿈꿔왔는 지도요. 그러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지난한 과거에 '왜 살아야 하지? 대체 내가 살아야 하는 인생의 의미는 뭔데!'라며 실존주의적 허무에 빠져 고통받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나의 자유의지로 시련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선택한 태도로 책임감을 가지고 삶의 질문, 시련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야겠습니다.

  삶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책임감을 갖는 다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건강관리,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한 재테크 공부,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는 태도를 통해 저의 책임감을 가지려고 합니다. 내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고 지켜야지만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이는 삶의 질문에 대답하는데 큰 밑 바탕이 될 것입니다. 또한, 내 삶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공부하고 능력을 쌓아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끄러운짓은 하지 않고 정직하고 떳떳한 태도로 비록 성자의 경지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돼지는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삶의 방향성 재정립을 갈구하던 요즘, 내면 깊이 통찰력과 위로를 준 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였습니다.


추가. 만약 삶의 일회성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의 잠재 가능성이 실현되면 이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성이 실현되는 순간 현실이 되고 이는 곧 과거로 옮겨가 그곳에서 영원한 실체로 보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됩니다.

삶은 일회적이라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가능성'을 실현시키고 어떤 것을 그대로 둘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에서는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으며 이미 실현된 것들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랬다'처럼 확실한 존재 방식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염세주의자는 매일 같이 벽에 달린 달력을 찢어 내면서 얇아져 가는 달력에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지만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 낸 달력에 일과를 적어 놓고 그것을 순차적으로 차곡차곡 모아두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 매일 삶의 문제게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사람은 충실히 쌓아 놓은 삶의 기록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끼며 만족스럽게 지나간 삶을 반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용감하게 견뎌 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러니 삶의 일회성에 허무함을 느끼지 맙시다. 대신, 시시각각 얼굴을 들이미는 삶의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내가 내 인생에서 찢어낸 오늘이라는 달력에 자세히 기록해 둡시다. 우리의 지나간 추억과 과거는 없어지는 것이 아닌 영원한 실체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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